자본주의 제 1원칙
부제: 왜 우리는 혁신을 해야 하는가
지난 글에서 나는 혁신이란 실패를 거듭하며 매일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적었다. (지난글 참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대체 무엇이 사람을 그 고통스러운 실패의 사지로 밀어 넣는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치지 않고 시도하게 만드는 진짜 동인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세상에 전에 없던 것으로 인류를 조금 더 풍요롭게 하게 만드려고”라고 말한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인류의 삶을 바꾸겠다는 순수한 사명감 하나로 자신의 생을 던지는 혁신가와 예술가, 창작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사명감만으로 이 냉혹한 자본주의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매달 통장 잔고가 마르고 현실의 청구서가 날아드는 전장에서, 막연한 사명감은 너무나 쉽게 닳아 없어진다.
그렇다고 “단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혁신’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선택이다.
돈이 목적이라면 새로운 것을 발명할 이유가 없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고, 이미 검증된 비즈니스를 조금 더 싸게 모방하거나 프랜차이즈를 여는 편이 확률적으로 훨씬 안전하고 빠르니까. 세상에 없던 길을 내는 혁신은 언제나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가성비 최악의 도박이다.
숭고한 사명감만으로는 버틸 수 없고, 단순한 돈벌이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혁신으로 이끄는가?
자본주의 제 1원칙
이에 앞서 묻고 가야할 것이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 원가에 적당한 마진을 더해서?
틀렸다.
새삼 놀랍게도 그러나 당연하게도, 정답은 하나뿐이다.
"누군가 그 가격을 내고 사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제 1 원칙이라고 부른다.
캔버스 위에 빨간 페인트 몇 줄 그어놓은 현대 미술 작품이 왜 수십억,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가? 캔버스와 물감 원가가 비싸서? 아니다.
그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죽 몇 장으로 만든 명품 가방 하나가 왜 수천만 원에 팔리고, 심지어 로고 하나 박힌 붉은 벽돌 한 장이 왜 수십만 원에 리셀되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그 가격에 지갑을 여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7세기 튤립 투기와 몇 년전 있었던 광기의 NFT 투기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명쾌한 제1원칙이자 가격이 정해지는 불문율이다. 가격은 생산자의 원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기꺼이 지불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그 터무니없어 보이는 가격표를 군말 없이 받아들일까? 언제 그 가격에 토를 달지 않고 기꺼이 돈을 지불할까?
답은 명확하다. 바로 ‘비교 대상’이 없을 때다.
혁신은 무엇을 만드는가?
1902년,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현대식 에어컨을 개발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당시 뉴욕 브루클린의 한 대형 인쇄소는 매년 여름만 되면 지옥을 겪었다. 무더위와 습기 때문에 종이가 뒤틀리고 잉크가 번져 도무지 인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장 문을 닫아두는 동안 발생하는 손실은 막대했다.
이때 26세의 엔지니어 캐리어가 나타나 공기 중의 습기를 제어하고 실내를 차갑게 식히는 거대한 냉각 기계를 공장에 설치했다. 당시 이 기계의 적정 가격은 얼마였을까?
500달러? 5천 달러?
정답은 "구매자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 가격"이다.
첫 에어컨의 정확한 계약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후 상업화된 초기 에어컨 시스템의 가격은 오늘날 가치로 수억 원(당시 1만~5만 달러), 웬만한 집 한 채 값에 달했다.
그럼에도 공장주와 극장주들은 비싸다고 흥정하기는커녕,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열었다. 그 기계는 비교할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적이었다. 기계 값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한여름에 공장을 멈추지 않고, 텅 빈 극장을 사람들로 꽉 채워 벌어다 주는 가치가 그 기계 값의 수십 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캐리어는 경쟁사의 눈치를 보며 가격을 깎아줄 필요가 없었고, 인쇄소 주인은 그 비싼 가격표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누군가 그 돈을 기꺼이 지불했기에, 그 파격적인 숫자가 진짜 '시장 가격'이 된 것이다.
혁신이 사그라든 자리
하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에어컨 시장은 어떤가?
비교 대상이 생기는 순간, 게임은 완전히 달라졌다.*
냉각 기술은 완벽히 상향 평준화되었고, 수십 개의 제조사가 똑같은 부품과 냉매를 다룬다. 소비자는 가격 비교 사이트를 켜고 평수, 에너지 효율 등급, 전력 소모량을 나란히 세워놓은 뒤 단 몇만 원이라도 더 싼 모델을 클릭한다.
혁신이 사그라든 자리엔 남들보다 에어컨 필터를 조금 더 촘촘하게 만들거나, 원가 절감으로 가격을 100,000원 싸게 파는 것 등이 나타난다. 비교의 판 안에서 더 이상 혁신이라 할 것이 없어질 때까지 숨 가쁘게 헐떡이며 작은 혁신을 거듭해나간다. "제품 혁신!"을 외치며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보려 하지만 고객의 눈은 이미 높아져있고, 고객에게 실질적으로 가닿는 부가가치는 점점 작아져간다.
인류를 더위의 고통에서 해방했던 위대한 발명품조차, 비교 대상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한 푼이라도 깎아야 팔리는 스펙 경쟁의 감옥에 갇혀, 고전을 면치 못한다.
비교 대상이 존재하는 순간,
공급자는 가격을 결정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한다.
동네 카페의 아메리카노 한 잔이 4천 원인 이유는 원두와 종이컵의 원가가 800원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옆집 카페가 4천 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런 설명 없이 8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는 순간, 손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옆집이 가격을 내리면 나도 내려야 하고, 옆집이 쿠폰을 뿌리면 나도 마케팅 비용을 태워야 한다. 남이 정해놓은 가격표에 내 사업의 숨통이 쥐여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수많은 자영업과 소상공인이 빠져드는 소모적인 가격 경쟁의 본질이다. 소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수요와 공급곡선' (보이지 않는 손;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혁신을 해야 하는가
다시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수많은 혁신가와 창업가들은 실패의 지옥을 통과하며 기어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려 할까? 그들은 그냥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인 걸까?
당연히 아니다.
남들이 이미 파놓은 웅덩이 안에서 100원, 200원의 마진을 지키기 위해 피 말리며 싸우는 삶, 곧 '비교당하는 룰'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비교 대상이 널려 있는 시장은 필연적으로 제로섬이다.
옆집의 손님을 뺏어오지 못하면 내가 굶어 죽는 판에서, 경쟁은 서로를 갉아먹는 소모전에 불과하다. 그 판 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치는 단 1 그램도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진정한 혁신은 남의 밥그릇을 뺏어 연명하는 싸움을 끝낸다. 세상에 없던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땅을 열어젖힌다.
캐리어가 에어컨을 만들었을 때, 그는 다른 기계공의 밥그릇을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는 공장을 돌릴 수 없다는 세상의 한계를 지워버리고, 산업 전체의 지평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넓혔다.
혁신은 제로섬(남의 밥그릇 뺏기)을
포지티브섬(새로운 파이 창출)으로 바꾸는 유일한 행위다.
서로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다 함께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그 닫힌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는 일. 남의 밥그릇을 탐내는 대신 새로운 파이를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가혹한 실패의 대가를 감수하면서도 혁신이라는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본질적인 이유다.
➔ 다음 편 예고: 경제위기 곧 올까?
*피터 틸은 "경쟁은 패자들의 것이다(Competition is for losers)"라고까지 강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다. 경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당하여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것이고, 이로서는 절대 승자가 될 수 없음을 꼬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