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창업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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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땅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을 위해,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길을 안내해 본 적이 있는가?

일상의 도시에서는 몇 걸음 떨어진 이웃조차 경계한다. 손해를 피하기 위해 두꺼운 계약서를 쓰고, 보증을 요구하며, 제도적 장치로 서로를 묶어둔다.

그런데 되려, 내가 알고 있던 시스템이 모두 멈춰선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2020년 3월

팬데믹으로 스페인의 모든 도시가 닫히기 시작하던 무렵.

세비야에서 알게된 세계여행자 나래가 돌아오는 막차를 놓치며 낯선 도시 그라나다에 고립되었다. 휴대전화 요금제 마저 바닥나 연락조차 끊길 위기. 해는 떨어지고, 지도마저 먹통이니 나래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그러다 떠오른 사실 하나! 데이터가 간당간당하다길래, 출발 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건넨 수신만 되는 유심 하나가 떠올랐다. 나래야! 내가 준 유심 껴봐. 그거 전화 수신은 될거야!

'...어! 된다!'

전화가 걸리는 수신음이 들리자마자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구글맵을 켰다.

"역을 뒤로 두고, 오른쪽으로 쭉 걸어! 꽤 걸어야해."
"어어!! 지금 걷고 있어"

...

"지금 뭐가 보여!"
"깜깜해서 안보이는데, 무슨 학교 같은 큰 건물이 있어!"


골목과 건물을 실시간으로 짚어주며 렌페역으로, 다시 역무원이 적어준 체육관 임시 대피소로 이끌었다. 그야말로 한밤중의 아바타 내비게이션이었다.

도심의 셈법으로 본다면 몇 시간 동안 남의 길을 찾아줄 법적 의무도, 보답에 대한 약속도 없었다. 그저 길 위의 동료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가볍게 얹어준 손길이었을 뿐이다. 내 일상을 해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건넨 호의였기에, 피로감 대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신뢰 자산이 붕괴된 정글에서 피어나는 역설적인 연대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저서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에서 이와 닮은 상인 집단을 조명한다. 홍콩 청킹맨션의 아프리카 보따리상들은 세상 누구도 믿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도 낙오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안전망을 가동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원리가 바로 겸사겸사의 호혜성이다. 내가 오늘 너를 돕는다고 해서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손을 내밀고, 언젠가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꼭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손을 내밀 것이라는 열린 기대. 제도와 신뢰 자본이 바닥난 환경일수록, 인간은 생존을 위해 가장 유연한 상호부조를 만든다.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갈라파고스, 2026.

발가벗은 존재

알고 있던 상식과 룰이 통하지 않고 사회적 직함을 유지할 수 없는 조난의 순간, 인간은 결핍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계산기를 두드릴 여유조차 없는 완벽한 이방인, 그 무방비 상태에서 비로소 조건 없는 연대가 싹튼다.[1]

이 여행자의 원리는 창업의 세계와 그대로 겹쳐진다. 0에서 1을 만들어가는 영역에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직함이나 대기업의 간판이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 혁신에 뛰어드는 순간 누구나 낯선 밤거리에 홀로 남겨진 초행길의 여행자다.

홀로 모든 결정을 감당해야 하는 1인 창업가에게, 시장은 가혹한 정글 그 자체다. 자금과 제품, 정신적 소모와 체력적 한계에 이르기까지 - 매일 감당하기 벅찬 변수를 마주한다. 이 험난한 길 위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안을 얻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생존의 욕구일 것이다.

이 때, 창업가들에게 힘이 되는 것은 무거운 계약과 이해타산으로 얽힌 네트워크보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동료의 짐을 가볍게 거들어주는 느슨한 연대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나누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료의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아 주는 작은 호의들. 그 겸사겸사의 나눔이 거듭될 때, 어떠한 계약서로도 메울 수 없는 단단한 신뢰 자본이 형성된다.

야생 그 자체인 시장에서 창업가들이 굳이 모여 안부를 묻고 작은 손길을 나누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버티기 힘든 정글에서도, 함께 걷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걸어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오늘 하루, 내 사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앞에 서 있었다면. 혼자서 모든 것을 버텨내야 한다는 고립감에 숨이 턱 끝까지 찼다면.

기억했으면 좋겠다.
무척이나 당황스럽던 그라나다의 밤. 길을 열어준 것은 대단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무심코 건넨 수신 전용 유심칩 하나와 지도를 함께 봐주던 작은 호의였다는 것을.

지속 가능한 사업의 본질은 결국 이 느슨한 연대 위에 있다. 서로의 짐을 겸사겸사 거들어주는 이 작은 연대. 우리 팀이 창업가들을 모아 새로운 마을을 짓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침.)


[1] 김영하 작가도 <여행의 이유>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