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지난 글에서 우리는 지금의 AI 열풍 이면에 숨겨진 거대한 부채의 탑과 제로섬 치킨게임을 들여다보았다.
이 진단을 마주하면 누구나 한 가지 불안감이 치밀어 오른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 아냐?
거품이 터지면 AI도, 스타트업도 다 같이 죽는 거 아닌가?"
2001년 닷컴 버블이 터졌을 때도 사람들은 똑같이 말했다. 당시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 아래 수천 개의 닷컴 기업이 쏟아져 나왔지만, 거품이 꺼지자 허무하게 문을 닫았다. 실리콘밸리는 초토화되었고, 사람들은 인터넷이 희대의 사기극이었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 아주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호황의 역설
왜 인터넷의 진짜 황금기는 돈이 넘쳐나던 거품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모두가 망해 나간 폐허 위에서 열렸을까?
사람들은 돈이 넘쳐나는 호황기가 창업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투자받기는 쉬울지 몰라도, 제대로 된 회사를 만들기는 만만찮다.
돈 구하기가 쉬울 때는 알맹이가 없는 회사들이 시장을 점령한다. 뚜렷한 수익 모델이나 기술이 없어도, 그저 유행하는 간판을 달고 투자를 받는다. 그 돈으로 무료 혜택을 뿌리며 덩치를 키워 혁신 기업으로 포장한다.
이런 좀비 기업*들이 판을 치면 정작 내실 있게 승부하려는 회사는 숨이 막힌다. 그들이 투자금으로 개발자 연봉과 마케팅 단가를 끝없이 올려놓기 때문이다. 고객들 역시 투자금으로 만든 무료 혜택에 눈이 가려, 누가 진짜 가치를 주는지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장에는 주기적으로 찬물이 필요하다.[1]
거품이 꺼지고 돈줄이 마르면, 투자금에 기대어 살던 쭉정이들은 즉시 고꾸라진다. 치솟았던 인건비와 광고비는 제자리를 찾고, 시장을 흐리던 허상들이 사라진다.
불황은 모든 것을 망치는 재앙이 아니다. 과열된 시장을 다시 평평하게 고르고, "진짜 가치를 생산하는" 제대로 된 알곡만 남겨두는 자본주의의 까부르기다.
공짜가 된 철길
거품이 꺼지고 쭉정이들이 쓸려 나간 자리.
여기서 자본주의의 가장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투기꾼과 회사는 망해도, 그들이 깔아놓은 인프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2]
1840년대 영국에서 철도 광풍이 불었을 때, 투기꾼들은 돈을 벌겠다며 영국 전역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결국 거품이 터지고 수많은 철도 회사가 파산했다. 하지만 회사가 망했다고 땅에 깔아놓은 철길까지 사라졌을까? 아니다. 그 철도망은 고스란히 남아 영국의 산업혁명을 폭발시키는 핏줄이 되었다.
지금 빅테크들이 수백조 원을 태우며 벌이는 AI 투자 경쟁도 정확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은 시장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며 기술을 풀고 있다. 심지어 오픈AI조차 월 200달러짜리 요금제를 쓰면 쓸수록 적자가 난다고 고백하면서도[4],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AI 사용료를 몇 년 새 10분의 1 이하로 낮추고 무료 모델을 쏟아내고 있다.
거품이 꺼지고 나면 투자자들의 계좌는 녹아내리겠지만, 빅테크가 대신 수업료를 내고 만들어놓은 결과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오픈소스 모델들, 헐값이 된 AI 사용료, 그리고 이미 AI에 익숙해진 전 세계 소비자들까지.
빅테크들이 자기 돈을 태워 우리 눈앞에 거대한 고속도로를 깔아준 셈.
멋진 신세계
고속도로가 다 깔리고 통행료가 공짜에 가까워지면, 마침내 무대의 주인공이 바뀐다*.
2001년 닷컴 버블. 당시 거대 통신사들은 인터넷 시대가 온다며 수조 달러의 빚을 내어 바다 밑에 광케이블을 깔았다가 줄도산했다. 하지만 그들이 파산하며 헐값에 남기고 간 광케이블 덕분에, 인터넷 사용 비용이 거의 공짜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는 곧 찬란한 IT 기업들의 시대를 열었다.[3]
그래서, AI 거품이 꺼지냐고?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다만 거품이 꺼진 곳에는 빅테크가 거의 공짜 수준으로 낮춰놓은 기술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이를 부품처럼 가져다, 고객이 기꺼이 제값을 지불할 만큼(심지어, 할인이 없이도!) 절박한 현장의 문제를 푸는 자들이 속속들이 나와 자라날 것이다.
투자자들은 다가올 겨울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창업가에게 이 계절의 변화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거품이 걷히고, 기술은 흔해지며, 운동장은 서서히 평평해지고 있다.
"진짜 창업가"들이 맞이할 멋진 신세계는, 바로 이 폐허 위에서 시작된다.
(마침.)
참고
- 불황의 정화 효과와 상흔 효과: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불황이 비효율적인 한계 기업을 퇴출시키고 자원을 혁신 기업으로 재배치하는 정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반면 현대 거시경제학의 실증 연구들은 불황기 신용 경색으로 인해 잠재력이 높은 초기 기업들까지 자금난으로 도산하는 상흔 효과도 함께 발생함을 지적한다. 결국 불황기에는 외부 투자금 없이 자체 현금 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자생력이 생존의 핵심 기준이 된다. - 기술 혁명과 금융 자본:
베네수엘라 출신의 경제학자 칼로타 페레즈(Carlota Perez)가 정립한 이론이다. 지난 250년간 다섯 차례의 기술 혁명(산업혁명, 증기기관과 철도, 철강과 전기, 석유와 자동차, 정보통신)을 분석한 결과, 모든 기술 혁명은 금융 자본이 거품을 일으켜 인프라를 까는 1) 설치기, 그리고 버블 붕괴 전환점 이후, 기술이 실물 경제 전반에 퍼지며 실질적인 번영을 이루는 2) 배포기의 주기를 거친다고 밝혔다. - 닷컴 버블의 유산:
1990년대 후반 통신 기업들은 인터넷 트래픽이 폭발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 약 5,000억 달러 이상을 들여 전 세계에 광케이블을 매설했다. 2001년 버블이 붕괴하며 월드컴(WorldCom), 글로벌크로싱(Global Crossing) 등 거대 통신사들이 파산했고 매설된 광케이블의 90% 이상이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덕분에 인터넷 대역폭 비용이 극단적으로 낮아졌고, 폭락장을 버텨낸 아마존과 구글의 성장 및 유튜브, 넷플릭스, 클라우드 산업이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 AI 기업의 적자 보조금 구조:
오픈AI와 앤트로픽은 매년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막대한 차세대 모델 학습비와 무료 이용자 서버 비용 때문에 연간 수십억 달러의 순손실을 투자금으로 메우고 있다. 특히 샘 알트먼 오픈AI 대표는 2025년 초 월 200달러짜리 최상위 요금제 헤비 유저들의 막대한 연산 사용량 때문에 쓰면 쓸수록 회사가 적자를 보고 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용어
- 좀비 기업:
영업활동이 아닌 저금리 대출이나 정부 지원사업 그리고 투자자의 추가 자금 수혈에 의존해 파산을 면하고 연명하는 한계 기업. - 설치기와 배포기
1) 설치기: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금융 자본이 몰려들어 인프라를 무섭게 설치하는 시기. 필연적으로 거대한 자산 버블과 양극화를 동반한다.
2) 배포기: 버블이 한번 터지고 난 뒤, 이미 깔려 있는 저렴해진 기술과 인프라 위에서 사회 전반의 산업이 결합해 실질적인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