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방황을 통해 방향을 찾다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진짜 내 고유 브랜드를 지어야겠다고 다짐한 다음 날.
방구석에 갇혀 실체 없는 콘텐츠만 찍어내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작은 스톱워치를 올려두는 것이었다.

런던의 미술관에서는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도 비효율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현실에서 직업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했다. 돈을 받고 고객이 기다리는 작업을 하면서, 내 만족을 채우느라 4시간이면 끝날 일을 8시간씩 붙잡고 있는 것은 결코 프로의 자세가 아니었다.

스톱워치는 창작자로서 나의 고유한 시간을 지켜내기 위한 훈련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의뢰받은 작업을 명확하게 끝내고, 남은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비전을 그리는 데 사용해야 했다. 똑딱거리는 숫자를 보며 나는 일과 예술, 비즈니스와 크리에이티브 사이의 균형을 하나씩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본성
스톱워치로 시간의 여백을 확보하자,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내 안의 본성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펜만 쥐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10대 시절의 나는 친구들과 함께 3,000명 규모의 컨퍼런스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며 사람들을 모으던 주도적인 기획자였다.

10년 가까이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다 보니, 내가 원래 직접 판을 짜고 무대를 세우는 것에 가슴 뛰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나는 유럽의 길거리에서 혼자 펜을 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순간은 그 자체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 가장 나다운 방식이었다. 펜화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의 내러티브를 전달하기 위해 내가 쥐고 있던 날카로운 도구였을 뿐.
'그래!'

뤼코뮤지엄
이런 생각들이 들자, 방구석에 앉아 클라이언트를 기다리는 일은 멈추기로 했다. 나는 노트북과 스톱워치를 챙겨 창작자들이 모이는 코워킹 스페이스, 로컬스티치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케터, 디자이너, 개발자들과 뒤섞여 대화하며 닫혀 있던 시야를 넓혔다. 다른 직군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협업의 기회를 만들고, 오프라인 기록 전시를 열어 나의 작업물을 사람들에게 직접 소개했다.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 속에서, 유럽에서 막연하게 품었던 한국 문화를 힘 있게 디자인하겠다는 비전이 구체적인 실체를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브랜드, WRKOmuseum (뤼코뮤지엄)이 탄생했다.
We Are Korean의 약자를 딴 이 이름에는 펜화를 기반으로 한국의 문화를 기록하고, 가상의 미술관을 지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고자하는 나만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이름 그대로 "뮤지엄"에 한발짝씩 나아가기 위해 출판물과 오브제를 기획하고, 커뮤니티를 설계한다. 나만의 서사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이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맞다. 이제야 비로소 나답다.

방황 끝에 방향을 찾다
카메라와 펜, 노트 하나만 들고 무작정 떠났던 셀프 유학.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텅 비어있던 나의 배낭은 수많은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만의 무대라는 명확한 해답으로 채워졌다.

정답은 사실 먼 이국땅에 있지 않았다. 이미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던 기획자의 본능, 내러티브를 만드는 자로서의 정체성. 이것을 길고 고독했던 여행이 비로소 끄집어내어 주었을 뿐. 결국 나의 셀프 유학은 내 안의 창작 세계관을 튼튼하게 구축하는 시간이었다.
방황하던 순례자들이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을까?

배낭을 메고 호기롭게 떠났던 나의 첫 번째 여행기는 아쉽지만 여기서 끝을 맺는다. 유럽의 골목길에서 펜을 쥐었던 시간들. 그래, 그 순간은 나도 모르는 새 내 인생의 지도를 그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이 여행은 방황하던 내게 앞으로 걸어야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금. 서울 한복판.
비즈니스 그리고 창작이라는 또 다른 안갯길 속에서 나는 닻을 올린다. 두렵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호흡하며, 두번 째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스톱워치의 버튼을 누른다. 다시, 선을 그을 시간이다.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마침.
이하정 작가 인스타그램 👉🏻 @leehaa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