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여행이 끝난 자리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Ep.7 여행이 끝난 자리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다. 길었던 셀프유학의 낭만도 함께 착륙한다.

배낭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나는 당장의 생존이라는 벽과 마주해야 했다. "세계 여행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타이틀은 여행지에서 통용되던 수식어였을 뿐, 서울의 한복판에 다시 선 나는 뾰족한 비즈니스를 증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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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작업실로 셋팅하고 작업했던 8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려고 매일같이 SNS에 올릴 콘텐츠를 찍어내고 업로드했다. 나만의 확고한 제품이나 비즈니스 모델도 없이 겉보기에 그럴싸한 브랜딩에 집착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무기력한 콘텐츠 공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곤? 보란 듯 제동이 걸렸다.

귀국 한 달 만에 찾아온 지독한 번아웃을 맞닥뜨렸다.

시작한지 한달만에 번아웃을 맞이하다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던 어느 깊은 밤이었다. 피로에 절어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내 시선이 구석에 쌓인 유럽의 드로잉 노트들에 닿는다. 무심코 노트 한 권을 펼쳐 든다. 종이 위를 빽빽하게 채운 서툰 펜선들 사이로, 익숙한 듯 낯선 문장들이 불현듯 스치더니 이내 눈에 들어와 뇌리에 박힌다.

암스테르담 에이전시, 무작정 문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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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머물던 시절, 세계적인 디자인 에이전시가 숙소 근처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가슴이 뛰었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였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무작정 그들의 건물 앞을 서성이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 여행자인데, 이곳을 탐방할 수 있을까요?"

비록 담당 매니저가 휴가 중이라 들어가보지는 못했다만...
그때의 나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고, 주도적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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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구조화했던 마인드맵

노트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칫한다. 암스테르담의 낯선 문을 당당히 열어젖히던 그 대담한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나? 향방 없는 SNS 콘텐츠 생산에 매달리며 닳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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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언리미티드에디션> 현장. 창작물을 알리는 작가들

노트의 페이지를 조금 더 넘긴다.
이번에는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 휘갈겨 쓴 메모.

한국의 고궁이나 식문화, 수많은 역사적 맥락,
그리고 현대의 역동적인 문화를
이런(눈 앞에 있던 작품들의 서사) 식으로 힘 있게 디자인해낸다면 어떨까?
경복궁을 담은 그림

갤러리에 걸린 거장들의 수많은 작품들. 그 앞에서 숨죽였던 그날, 나는 스킬의 부족이라는 핑계 그리고 조급함을 버리고,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노라 다짐했었지.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나만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서사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본다. 그렇게 가슴 벅찬 비전을 품고 돌아왔건만... 정작 한국에서는 당장 눈앞의 반응을 좇느라 중요한 방향성은 까맣게 잊고 있던 나를 잔인하게 대면하고야 만다.

SNS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제품 혹은 브랜드의 실체와 브랜딩이 밸런스를 이뤄야한다는 것.

문득 깨닫는다. 나의 유학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여행지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질문들, 암스테르담에서 증명했던 나의 주도성, 그리고 런던에서 품었던 거대한 비전. 이 모든 생각의 조각들을 내 삶에 뿌리내리게 할 때, 그 때서야 비로소 나의 유학이 완성되는 것일테지.

모니터 화면 속, 의미 없이 띄워져 있던 SNS 창을 가만히 닫는다.

더 이상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콘텐츠 공장으로 머물 수는 없다. 유럽의 골목에서 펜 하나로 나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처럼, 이제는 서울의 현실 속에서 나의 내러티브를, 한국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던지는 비즈니스를 만들어야 한다.

브랜딩이라는 미명하에 보여주기식 콘텐츠에 매달리던 작업을 멈추기로 했다.

여행에서 찾은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비전을 온전히 담아낼 브랜드를 오롯이 세워가기 위해.

여행사진으로 만든 B5 엽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