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친구
울란바토르를 떠난 첫날, 파란색 푸르공*의 엔진이 완전히 뻗어버렸다. 출발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견인차를 부를 수도 없는 끝없는 초원. 가이드 줌베와 또래 느낌의 활기찼던 어린 운전기사는 결국 고장 난 차를 몰고 홀로 돌아가야만 했다.
첫 숙소에서 우리가 잠든 사이 도착한 새 차. 현지 여행사에선 더 좋은 프리미엄차로 업그레이드 해 준 거라고 생색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스타렉스였다. 운전석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말수가 없는 무뚝뚝한 기사님이 앉아 있었다. 밤새 달려오셨겠지.
다음 목적지를 향한 끊임없는 오프로드 주행이 이어지던 중, 갑자기 가이드 줌베가 경치도 볼 겸 잠시 쉬어 가자며 차를 세웠다. 언덕에 내려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데, 기사님은 심심한 듯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 땅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계셨다.
그때, 저 멀리서 말을 탄 행인 한 명이 다가왔다. 기사님이 말을 걸자, 행인은 선뜻 말에서 내려 돌 위에 턱 걸터앉았다. 두 사람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십년지기 친구 같았다.
'저 두 분, 원래 아는 친구인가?'
가이드 줌베에게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야."
"어? 정말로? 근데 저렇게 대화를 한다고?"
"우린 길 가다가 사람 만나는 경우가 흔치 않거든. 반가워서 그래.
뭐, 울란바토르에서는 아니지만."
우리가 차에 올라타기 직전까지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각자의 길을 떠났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 한가운데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경계
줌베가 진짜 몽골 원주민의 삶을 보여주겠다며 데려간 곳. 게르 안에는 엄마와 두 아이가 우리를 맞아주려 서있다. 첫째는 엄마의 치맛자락 뒤에. 키가 첫째의 가슴팍도 채 오지 않는 둘째는 엄마 뒤에 숨어 우리를 훔쳐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들. 엄마가 건네준 전통 수프를 먹으면서도 아이들은 우리 눈치를 보며 먹는 둥 마는 둥, 자꾸만 먹던 숟가락을 내린다.
일행 중 한 명이 작은 인형을 꺼냈다. 아이는 선뜻 받지 못한다. 아직 낯설고 무서운지, 이방인의 물건을 받아도 되는지 엄마의 얼굴만 힐끔거린다. 엄마의 짧은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는 조심스레 인형을 받아 든다.
밖으로 나가자 평생 본 것보다 많은 말과 양 떼가 한 곳에 있었다. 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칭기즈칸의 후예다운 호탕한 미소를 짓는 유목민 아저씨. 한 번 잘못 차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옆구리에 낀 채 포즈를 취해 보인다. 갓 짜낸 아이락(마유주)을 내어주길래, 눈 딱 감고 꿀꺽 맛을 본다.
'어? 생각보다 괜찮네? 요구르트 같은데?'
이내 엄지를 치켜세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목민 일원들이 양털을 깎는 작업이 한창이다. 무거워 보이는 양을 눕히고 털을 벗겨내는 거침없는 손길. 꼬질꼬질한 털을 벗고 벌거숭이가 된 양들이 "메에-" 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하지만 내 시선은 어느새 양털 깎기에서 멀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아빠(맞다. 옆구리에 말을 끼던 대장님) 옆을 서성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첫째 아이.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쯤 섞인 그 눈빛.
그런 소녀 앞 내 손에는 아까부터 마이쮸 하나가 쥐어져 있다. 게르 안에서부터 주고 싶었는데, 혹여나 아이가 무서워할까봐 줄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며 손에 꼭 쥐고만 있었던 것.
'줘도 되나? 도망가면 어쩌지?'
체온 때문에 반쯤 녹아 말랑해진 젤리.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순간 아이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다. 젤리를 하나 까서 입에 넣더니, 얼굴에 짙게 드려있던 경계심이 스르르 풀린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바뀌려는 찰나,
"융! 얼른 차 타자! 이제 가야 해. 곧 해가 질 것 같아!"
조금만 더 일찍 줄걸.
잠깐 더 친구할 수 있었을텐데.
미소
아쉬움에 차에 오르기 전 뒤를 돌아본다. 아이는 한 손에 내가 준 마이쮸를 꼭 쥔 채, 고사리 같은 손을 펴서 작별 인사를 한다.
수줍은 미소. 환한 함박웃음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반가움과 아쉬움이 얽혀 있었다. 가슴 안쪽이 무언가 뭉클하고 따듯해진다.
며칠 뒤, 푸른 초목지에 자리 잡은 어느 게르.
그곳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세 아이가 있었다.
앞선 유목민 아이와 달리, 이 아이들은 부끄럼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손님들을 방해하지 말라며 소리치는 엄마의 만류. 그리고 외지인을 향한 아이들의 호기심. 그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까르르 웃으며 자기들끼리 엉켜 놀던 녀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셋은 어깨를 맞대고 씩 웃어 보였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순박한 우정이 너무 예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이 아이들이 크면, 이 우정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흐뭇하게 지켜보던 것도 잠시. 우리를 향했던 아이들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낯선 외지인을 향해 반짝이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들은, 어느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으로 향해 있었다.
이 아름답고 거대한 대자연 속에서
결국 아이들의 마음을 훔친 건 스마트폰이라니...
조금 전까지 감탄했던 몽골 시골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와장창- 문명의 기술이 이 오지까지 닿아 아이들의 순수함을 망치는 건 아닌가 싶어 살짝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대자연을 보러 이 먼 오지까지 왔는데, 아이들은 저 작은 화면 너머의 화려한 세상을 궁금해하고 있다니. 어쩌면 꽉 막힌 도시에 살든 텅 빈 초원에 살든, 사람은 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좇으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물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끝끝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던 세 아이들. 척박한 길 한복판에서 처음 본 행인과 십년지기처럼 수다를 떨던 무뚝뚝해 보이던 기사님. 사람 자체가 낯설어 경계심 가득하던 여자아이의 수줍은 미소.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이 확 트인 대자연은 내게 정답 대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여줄 뿐이었다.
*푸르공: 몽골투어의 상징, 오프로드용 승합차를 말한다. 보통 색상이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