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디자이너 ➔ 일러스트레이터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Ep.6 디자이너 ➔ 일러스트레이터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런던의 미술관과 에든버러의 거리를 거치며 나는 분명한 해답을 얻었다. 단순히 예쁘고 테크닉이 뛰어난 그림이 아니라, 나만의 철학이 담긴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결심이 서자 곧바로 새로운 갈증이 밀려왔다. 힘 있는 디자인은 그저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선을 긋는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향유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먼저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맥을 짚어내야만 했다.

나는 이 거대한 도시의 표면적인 낭만에 취하는 대신, 현지인들의 진짜 삶과 거대한 흐름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캔버스 밖의 세상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읽어내는 것. 이것이 내가 배낭을 메고 떠나온 '셀프 유학의 꽃이 아닐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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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포일스 서점 로비에서

마이크로한 취향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가장 먼저 짐을 풀고 향한 곳은 어김없이 서점이었다. 화려한 사진을 남기기 좋은 핫플레이스보다, 현지인들의 진짜 관심사가 날것 그대로 쌓여있는 서점 매대야말로 도시의 속살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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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포일스 서점

런던의 한 서점에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책을 분류하는 카테고리가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달랐다. '스포츠' 코너 대신 football과 baseball이, '푸드' 코너 대신 vegan과 diet cook이 꽂혀 있었다. 심지어 '10대를 위한 LGBT'라는 주제가 당당히 한 책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 마이크로한 취향과 방대한 정보의 양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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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서점에서

피부로 느끼는 물가

배고픈 여행자의 끼니를 해결해 주던 현지 마트도 훌륭한 교실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같은 유럽인데 왜 물가가 저렴한지, 터키의 가격표는 왜 매일같이 요동치는지.

진열대의 숫자들에 던지게 되는 무수한 질문들은 자연스레 세계 경제와 역사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모니터 앞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말그대로 살아있는 질문들. 나는 비로소 세상의 흐름을 스스로 읽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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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한인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신라면

AI와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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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공용오피스에 자리를 잡고 다른 창작자들의 모니터를 어깨너머로 관찰하는 것은 나의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마지막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는 사건과 마주했다.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된 멕시코 출신의 디자이너 친구. 그는 내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AI 툴 '달리(DALL-E)'를 켰다. 프롬프트 몇 줄이 입력되자,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펜을 쥐고 매달렸던 특유의 펜화 스타일이 단 1분 만에 화면 위에 구현되었다.

숨이 턱 막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는 비수처럼 꽂혔다.

"하정! 디자이너도 기술을,
더 넓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해."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책상 앞에 웅크려 앉아 선의 굵기와 구도에만 집착하던 소위 '테크닉'은, AI가 순식간에 대체해버릴 수 있는 아주 얄팍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결국 '시각적인 강렬함과 완벽함'이라는 범주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내러티브를 그려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핫하다는 스페셜티 카페의 긴 줄 끝에 섰다. 커피 한 잔을 받는 데 한참이 걸리고 가격마저 사악했지만, 사람들은 불평 하나 없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커피의 가성비나 효율을 따지지 않았다. 그 곳만의 철학으로 직접 로스팅한 고유한 맛을 고집했고, 브랜드가 던지는 경험을 향유하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이 열광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예쁜 결과물이어서가 아니구나!'

카페 한구석에서 사람들을 스케치하던 중, 내 안의 엉켜있던 실타래가 스르륵 풀려나갔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무엇이란, 그 안에 담긴 깊은 취향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공감할 때 만들어진다는 것.

이제 나는 나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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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그동안 꽉 쥐고 있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대신, 그 대신 그 빈자리에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채워 넣었다. 그저 예쁜 결과물을 납품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내 안의 철학과 서사를 펜 끝에 담아 내러티브를 창작하고 전달하는 사람. 스토리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

그렇게 내 길었던 셀프유학이 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