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돈 vs 꿈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Ep.5 에든버러의 예술가

차갑고 묵직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중세 시대의 짙은 회색빛 건물들이 안개 속에 서 있는 도시의 골목길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한 예술가의 집을 에어비앤비로 빌려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작곡, 사진, 그림, 피아노까지 다방면으로 다루는 독일 출신의 이민자 예술가. 타국에 홀로 넘어와 낯선 도시에서 예술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

런던의 거대한 미술관에서 '스킬'이나 '효율'에 대한 강박은 한층 내려놓은 듯 싶었다. 그런데 웬걸.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안고 스코틀랜드로 넘어왔다지만, 이내 현실적인 불안의 목소리가 마음 한 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과연 나는 창작자로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하면서도 돈을 버는 게 가능할까?'
조급함의 형태가 '스킬'에서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바뀌어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런 내게, 매일 저녁마다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일상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루틴의 연속이었다.
가방 한가득 챙겨 넣은 초콜릿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면 그녀는 어김없이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고 외출에 나섰다. 작업할 도구가 잔뜩 들었나 싶었는데, 우연히 열린 가방 속에는 엉뚱하게도 초콜릿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 초콜릿들 다 뭐예요?"
"아, 피아노 치러 가려고.
길거리에서 내 연주를 들어주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거거든."
그녀는 매일 저녁마다 찬 바람이 부는 에든버러의 길거리로 나가 피아노를 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들으면, 꼬마 아이들의 손에 초콜릿을 쥐여주며 해맑게 웃었다.
누군가가 돈을 내고 의뢰한 공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팁을 구걸하기 위한 버스킹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연주를 들어주는 것이 기뻐서 자기 돈으로 산 초콜릿을 나눠주는 사람. 철저하게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처럼 보였다.

UI 디자이너 시절의 계산적인 잣대를 들이대던 나는 참다못해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타지에서 이렇게 매일 저녁 무료 연주를 하고 초콜릿을 나눠주면, 도대체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는 건지. 불안하지는 않은지. 남들이 어떻게 돈을 버냐고 묻는 시선이 피곤하지는 않은지.
내 조급한 질문에 그녀는 건반 위를 날아다니던 손가락을 문득 멈추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단 한마디를 던졌다.
"This is my life. (이게 내 삶이야.)"
이게 내 삶이야
그 짧은 대답 안에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답이 압축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명확히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타국으로 넘어와, 흔들림 없이 매일 밤 피아노를 치러 나가는 사람.
그녀는 작곡, 사진, 그림 작업, 에어비앤비 호스팅까지 수많은 조각들을 엮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위 밥벌이를 해결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과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통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이런 것을 만드는 예술가입니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그 앞에서는 당장의 수익이나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던 나의 불안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고 다짐해놓고도, 여전히 '유명해져야 돈을 벌 텐데'라는 세속적인 껍데기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나를 노골적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는 것. 비효율적이더라도,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내 작업을 사랑하고 그 과정을 묵묵히 즐길 수 있는 태도.
초콜릿을 나눠주며 웃던 그녀처럼, 그저 선을 긋고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행위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는 순수함. 그것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내내 조급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발가벗겨진 듯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만의 템포
에든버러의 짙은 안개 속에서, 내 그림 위에 올라가있던 마지막 조급함이 걷히기 시작했다.

남들이 어떻게 돈을 버냐고, 일단 유명해지고 봐야하는 것 아니냐 묻는 시선에 흔들릴 필요가 없었다. 나만의 속도로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먼저 확립하고 살아내는 것. 그 단단한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가장 나다운 디자인'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에든버러의 밤거리에는 여전히 그녀의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겠지. 그 선율은 나에게 세 가지 명확한 나침반을 쥐여 주었다.
첫째, 남들의 시선에 쫓기지 말고 나만의 방향과 템포를 주시할 것.
둘째, 언제 어디서든 나라는 창작자의 정체성을 떳떳하게 알릴 것.
그리고 마지막. 돈과 유명세를 좇기 전에, '나는 과연 내 그림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가'를 매 순간 물을 것.
그녀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나의 예리한 0.05mm 펜촉이 다시금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