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학교 대신 도시를 골랐다

프롤로그. 학교 대신 도시를 골랐다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Prologue

오춘기

일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8년 동안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로 일했다.

회의실에서는 늘 남의 문제를 정리했다.

문서를 만들고, 화면을 설계하고, 일정을 맞췄다.

친구들이 대학을 다닐 때 나는 회사에 있었다.

누군가는 전공을 골랐고, 누군가는 방학마다 떠났다. 나는 출근했다.

그 시간이 헛되었는가?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배웠고,

어떤 말이 사람을 움직이는지, 어떤 구조가 서비스를 굴러가게 하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익힌 값진 시간들.

다만, 처음부터 구석에 있던 질문들이 어느 순간부터 급속도로 커져갔다.

나는 이 세상에 무얼 만들고 싶은 사람일까?

방황

헛헛한 마음에 이런저런 시도가 이어졌다.

사진,
드로잉,
독립출판,
영화 제작,
심지어는 연기 학원까지도 기웃거렸다.

책상 위에는 늘 다른 노트가 쌓였고, 가방 안에는 펜이 굴러다녔다.

손에는 항상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꽤 오랜시간 끌고 다녔다.

하지만, 서른이 가까워질수록 남은 단어는 몇 개뿐.

디자인, 그림, 브랜드, 나만의 고유한 무엇.

문득, 디자인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다.

평소에 좋아하던 디자이너와 멋지게만 보였던 스타트업들은 영국에 있었다.

'유학을 갈까?'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언어,
돈,
무엇보다 이게 진짜 내 길일까 하는 확신,

모든 것이 애매했다.

미련이 남아 켜 본 입학처 사이트에서는 포트폴리오를 요구했고,

막상 이를 정리하려하자, 가슴이 턱- 하고 막힌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무엇 앞에서 멈춰서는 사람일까.
무엇을 보면 손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일까.
어떤 장면을 마음속에 오래 품고 살고 싶을까.

떠날 결심

당연하게도
방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늘 하던 방식을 꺼내기로 했다.

서울의 골목을 온전히 누리며 걷던 습관.

이 걸음을 세계로 넓혀보기로 했다.

가방에는 늘 챙기던 세 가지만 넣었다.

카메라. 펜. 그리고 노트 몇 개.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나의 셀프유학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침.)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가 연재됩니다.

이하정 작가 인스타그램: @leehaa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