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댕 밥통과 보자기만으로 굿즈가 된다고? - 팔리는 굿즈의 조건

스댕 밥통과 보자기만으로 굿즈가 된다고? - 팔리는 굿즈의 조건

(글 하단에 에디터 조나단의 독자에게 전하는 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다 보면 참 별게 다 굿즈가 된다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가 히트를 친 것은 유물이 가진 본래의 매력 덕분이라 치더라도, 최근 부안의 시고르 잡화점(@sigor.variety.store) 피드를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저 촌스러운 꽃무늬 소품이나 양은쟁반은 분명 우리 할머니 댁에 굴러다니던 물건들인데?

저 평범하고 투박한 일상용품에 시골 감성이라는 스토리를 얹으니 지갑을 열게 만드는 세련된 기념품으로 둔갑한다.

진과스 그리고 광부 도시락

이 기막힌 비즈니스를 보고 있자니 오래전 대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화려한 타이베이 시내를 벗어나 지우펀에 도착했다. 소위 예스진지 라고 불리는 패키지 여행을 신청하지 않고, 구글링과 현지인들에게 물어 지우펀 숙소 하나에 짐을 풀었다. 그렇게 짐을 풀자마자 향한 곳은 낡고 빛바랜 폐광촌, 진과스였다. 사실 진과스(金瓜石)는 굳이 왜 왔나 싶을 정도로 볼 것이 많은 동네는 아니었다.

지우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과스(金瓜石).

기대와는 달리 녹슨 탄광 철길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관광의 거의 전부였달까? 이에 '괜히 왔나...' 약간의 후회가 밀려올 무렵 그 유명하다는 광부 도시락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값이 관광지치고 터무니없이 비싸진 않았지만 내용물이 대단히 충실한 것도 아닌 도시락. 맨밥 위에 짭조름한 돼지갈비 튀김 한 덩이와 절임 반찬 조금이 올려져 있었다.

제대로 된 밥 사진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내 관심사는 오직 이 도시락통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직원이 도시락과 함께 보자기로 곱게 싸인 도시락 하나를 더 준다.

'뭐지? 주문이 잘못 들어갔나? 아님... 1+1 인가?'

당황해하고 있으니, 광부들이 담아 먹던 것을 재현한 빈 도시락 통이라며 기념품이란다. 꼼꼼한 성격의 누군가가 야무지게 동여맨 듯한 촌스러운 보자기, 그 안에 든 투박한 스댕 밥통 그리고 평범한 나무젓가락 세트.

줏대가 없어 보일 것 같아 민망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후회하고 있던 마음을 깔끔히 철회했다. 오예! 오기 잘 했다!

만듦새를 유심히 뜯어보면 원가는 얼마 안 할 얇고 저렴한 스테인리스 통. 하지만 그 도시락통 하나가 진과스라는 밋밋했던 동네의 경험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냥 폐광촌이다. 볼거리가 오죽 없었으면 전통악기를 부는 사람이 제일 흥미로웠다.

경험이라는 것의 힘

보자기를 풀고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대만의 광부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탄광촌에서 땀 흘린 뒤 고기반찬을 까먹었을 광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도록 오브제 하나가 몰입을 돕는다. 이 투박한 밥통과 보자기를 기념품으로 고스란히 챙겨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잃고 '밥이나 먹자' 생각하던 내가 열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동네 철물점에 가면 몇천 원에 굴러다닐 법한 이 조합이 진과스를 대만 여행의 필수 코스로 만들었다.

결국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힘은 제품의 기능이나 가격 효율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생생한 경험 비즈니스는 더욱 귀해지고 그 가치는 폭등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일상의 물건이라도 이곳에 직접 와서 땀 흘리는 광부의 삶을 체험했고 그 증표를 일상으로 가져간다는 고유한 내러티브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입히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겠다.

창업의 여정 속에서 가끔은 진과스의 그 얇은 스댕 밥통을 떠올려본다. 고도화된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프로덕트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막대한 자본이나 기술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정말 필요한 건, 어쩌면 이 평범한 물건을 기꺼이 집으로 가져가고 싶게 만드는, 대체 불가능한 경험과 옹골찬 이야기 하나가 아닐까.

집에 와서도 몇 번 사용해봤는데, 마치 진과스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침.)


저자의 말

조금만 더 가볍게 적어보면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조언도 아닌 내 마음의 목소리다. (사실 데이터를 보고 생긴 마음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맞지... 내 글이 콘텐츠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깨달음을 주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결국 다소 교훈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지...

나는 이 사실을 50편 가까이 쓰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글은 점차 무거워졌고, 주제는 거대 담론이 됐다. 많이 덜어낼(편집할)수록 더 가치 있는 콘텐츠라고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행 중 소소하게 느끼고 방랑하며 찍었던 사진들과 이야기들은 중심 주제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사실 내 글은 여행기가 아니라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저 몇 자 끄적거리는 블로그처럼 쓰기는 싫었고, 기존의 여행기와는 다른 더 매력적이고 혁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는 나의 무모한 도전이었던 걸까. 글의 뽄새, 그리고 이 시점에서의 고민조차 참 '나 같아서' 피식 씁쓸한 웃음이 난다. 본래 진지한 인간이면서도 마냥 진지하고 싶지만은 않은, 위트와 유머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만 현실에서도 작문에서도 쉽지 않다. 이게 아마 추구미와 현실의 차이겠지.

이런 푸념을 들으려고 소중한 이메일을 내어주신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고민을 뚫어내야만 더 성장할 수 있고, 이 변화를 솔직하게 알리는 것(일종의 고지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생각되어 몇 자 적어보았다.

앞으로 이 글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나도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에 분명히 일어났던 여행의 사건과 기억들이 시간이 흐른 지금 어떻게 재해석되고 연결되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나중에 지나보면 다 연결된다.)'처럼 그 깨달음의 단편들을 짧게 전해보려 한다.

철저히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 여행에서 발생한 사건과 내 감정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이건 일종의 치열한 투쟁이다. 쉽지 않은 창업 여정 속에서 인사이트가 고갈되어 매일 새로운 공급에 목마른 지금, 별생각 없이 발길 이끄는 대로 떠났던(한때 내게 역마살이 있나 생각하기도 했다) 과거의 오랜 여행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나에게 새로운 힘이 되곤 한다.

수필도, 에세이도, 여행기도 아닌 잡탕 같은 무언가가 되겠지만, 나에게 있어 '여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니는 의미가 워낙 크고, 자타공인 여행 전도사로서 이 단어만 들어도 여전히 떨리고 설레기에 이 기쁨을 글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 싶다. 단 한 명이라도 이 글을 통해 여행을 떠나볼 마음이 생기고, 결국 짐을 꾸려 떠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며, 내가 글을 쓰는 노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 인생이라는 여정(관용적으로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인생은 진정 한 편의 여행 에피소드와 같다)을 진짜 여행처럼, 매일 두렵지만 기분 좋은 설렘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나의 이런 마음이 부디 여러분께 가닿기를 바란다.

the trail 시즌 2로 다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