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 곡성> Ep.3 해방

<해방일지 - 곡성> Ep.3 해방

곡성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일할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장을 보고, 밥을 차리고, 다 같이 상에 둘러앉아 떠들고, 계곡에 발을 담그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났다.

'휴... 일상에서 벗어나 완벽한 기획안을 구상하러 왔건만...' 처음에는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객 분석, 조사, 회의, 기획안, 그 빽빽했던 계획들은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서 기분 좋게 허물어졌다. 어쩌면 쉼마저 과제로 여기던 우리에게 이 속수무책의 시간이야말로 꼭 필요했던 여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셋째 날 오후, 마침 저녁 당번에서 제외된 나와 하민(공동창업자)에게 꿀 같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노트북을 챙겨 들고 초가집 처마 앞 의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맑게 갠 하늘 아래로 초여름의 살랑이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사이 시간마다 짬을 내어 일했다.

화면 속 기획서는 곡성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얗게 비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은 지난 며칠간 겪은 낯설고도 벅찬 감각들로 가득 차 출렁이고 있었나보다.

아참, 오전에 만난 이 워케이션 숙소사업 '러스틱 타운' 대표와의 만남이 남긴 여운도 진하게 남아있었다. 방치된 한옥마을을 되살려 다양한 청년들이 오가는 베이스캠프로 만들겠다, 그래서 지방을 살려야한다는 그의 눈 속에는 이미 그 미래가 와있는 듯했다. 진짜 사람들이 모이고 부대끼며 연대하는 생태계를 집요하게 만들어가는 사람.

"우리도 이런 공간을,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해."

초가집 처마 아래서 시작된 하민과의 대화는 점차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곡성에 오기 전까지 숨 막히게 답답했던 이유가 뭘까? 우리뿐만이 아닐 거야.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무채색의 거대한 빌딩 숲 속에서 각자의 색깔과 꿈을 잊은 채 쫓기듯 살아가고 있잖아."

문득 스티커 하나 없는 10만 원짜리 토종꿀을 욕심 없이 내어주시던 할머니의 넉넉한 미소,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달렸던 메타세쿼이아 길의 여유가 떠올랐다. 이 시골 마을의 조건 없는 환대가 우리에게 숨통을 틔워주었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을 그 답답한 무채색의 현실에서 탈출시키는 배를 띄우는 거야. 각자의 고유한 색깔을 되찾고, 진짜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낭만을 돌려주자."

"너무 길어."

"흠..."

"음. 답답하던 우리가 왜 여기서 해방감을 느끼고 있지?"

"!!?... 해방?..."

하민이 손가락을 크게 튕기며,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형! 해방 좋다! 해방촌 어때! 각자의 얽매는 것은 다르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 OO으로 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곳!"

순간, 살랑이던 바람이 멈춘 것처럼 기분 좋은 정적이 일었다. '해방촌'. 백지상태의 기획서 위에 처음으로 선명한 이름표가 새겨지는 순간. 이름도, 컨셉도 없어 막막하기만 했던 안개가 단숨에 걷히고,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만들어갈 세계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억눌렸던 압박감이 진정한 해방감으로 치환되는 짜릿한 유레카.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차안. 도망치듯 짐을 쌌던 출발 때처럼 가방 속엔 대충 욱여넣은 옷 두 벌이 고작이었지만, 묵직한 토종꿀 한 통이 더해져 돌아가는 짐은 제법 무거워졌다. 반면 천근만근이었던 마음의 짐은 신기할 만큼 가벼워졌다. 압박감이 걷힌 투명한 마음 한가운데엔 '해방촌'이라는 가슴 뛰는 목적지만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답은 생각이 빼곡한 회의실 칠판이 아니라, 여백이 흐르던 이 넉넉한 시골 마을에 처음부터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3박 4일의 곡성 워케이션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우리의 진짜 해방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해방 일지 시리즈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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