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 곡성> Ep.2 만남

<해방일지 - 곡성> Ep.2 만남

이른 아침, 공동창업자 하민, 수빈, 경서와 함께 섬진강을 끼고 달리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찍 눈을 떴다.

우중충할 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는 눈부시게 맑았다. 양옆으로 쭉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 사이로 찰랑거리는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초여름이라 아직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대신 뻐꾸기 소리가 완벽한 ASMR이 되어 귓가를 맴돌았다.

논길을 걷는 어르신들, 모내기가 막 끝난 논에서 푸르게 고개를 내민 새싹들. 6km를 달리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하얀 꽃향과 함께 기분 좋게 다가온다.

'그래, 지금 이렇게 예쁜 곳을 달리고 있잖아.'

'함께 뛰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고, 뛸 수 있을 만큼 건강하잖아.'

'자연은 저렇게 차곡차곡 제 성장을 해나가는데, 나는 왜 그리 급했을까.'

달리기 전만 해도 짓눌려 있던 기획의 압박감은 땀방울과 함께 날아갔다. '될 대로 되라'며 자포자기했던 마음이,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단단한 확신으로 바뀌는 내면의 쉬프트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급할 것 없었다.

러닝을 상쾌하게 마치고, 전날 찜해두었던 '토종꿀 팝니다'의 주인공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사실 그 팻말이 붙어 있던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 외관 탓에 처음엔 섣불리 꿀을 사기가 망설여졌었다. 전날 뙤약볕이 쏟아지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고, 팻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자 딴딴하고 정중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여보세요- 꿀요?
우리는 한봉(한국 토종벌)만 있어요. 양벌(서양벌)은 없어-."

초가집은 살림집이 아니라 꿀을 뜰 때만 쓰는 작업장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살을 태워버릴 듯한 뙤약볕 아래 내가 홀로 서 있었다는 것을.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등줄기를 미끄럼틀 삼아 흐르기 시작한다. 무거운 꿀을 들고 걸어 돌아올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다음 날 아침 차를 끌고 가겠다고 약속을 미뤘다.

돌아와서 열을 식히기 위해 급하게 내려 마신 아이스커피 한 ​

다음 날, 일행 중 한 명을 곡성역에 내려주고는 오늘은 섬진강을 따라 달렸다. 날은 더 흐렸지만 덥고 습해 죽을 맛이었다.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된 채로 차에 올랐다. '아- 살겠다' 에어컨 바람을 최대로 틀고 얼굴로 향하게 한 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탄식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고생 끝에 잠깐 찾아오는 꿀 같은 휴식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전화를 드리니, 아침에 오겠다던 우리들이 안 오길래 할머니는 벌써 일터에 나가셨다며, 지금 내려오시겠다고 했다. 8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는데, 역시 어르신과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다르다. 옆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데, 마침 화분에 물을 주시던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아, 여기 꿀 파시는 분이 있다고 해서요."

"어? 우리 동네엔 양봉(벌을 길러 꿀을 내림)하시는 분이 없는데?"

그 순간 조금 남아 있던 땀이 바짝 식는 것 같았다.

'어?! 마을에 양봉하는 사람이 없다니?',

'어디서 꿀을 떼다가 파는 분이신가?',

'만약 느낌이 이상하면 어떻게 거절하지?',

'사기당할 곳이 없어서 이 시골에 와서 당하나...'

머릿속이 온통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 차려던 찰나, 아주머니가 덥지 않냐며 식혜를 꺼내오시겠다고 한다.

내심 '시골의 수제 식혜인가!' 기대하며 받았는데, 익숙한 디자인의 캔 식혜였다. 시원한 캔 식혜를 받아들고, 이야기를 들으니 이 마을에 하나있는 교회의 목사님이시란다. 곡성 시내에서도 꽤나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들으면서도 나의 온 신경은 다른 곳에 가있다. '할머니는 이 언덕길을 얼마나 멀리서부터, 어렵게 오시는 걸까' 하며 문득문득 고개를 돌린다. 식혜가 캔 바닥을 보일 때쯤, 저 멀리서 체구는 작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보인다.

"아- 모르는 어르신이네~"

목사님의 한마디 말 에 일단 괜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가까워질수록 잔뜩 긴장하신 할머니의 표정도 선명해졌다. 웬 외지인 청년이 꿀을 사겠다고 찾아왔으니 어르신 입장에선 그럴 법도. 내가 먼저 다가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할머니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환하게 번진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집은 아주 정갈하게 잘 가꿔져 있었다. 방금 긴장감이 감돌던 그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할머니는 거리낌 없이 마당으로 우리를 들이며 자리를 내어주셨다. 그러고는 포장지도, 스티커도 없는 투박한 꿀통을 건네셨다.

"우리는 한봉(토종벌)밖에 없어서 한 해에 한 번밖에 꿀을 못 떠."

10만 원이라는 가격이 꽤나 부담스러울까 봐 걱정되셨는지, 할머니는 덧붙이셨다. "아들이 이거 도시 들고 가면 20만 원에 판다던디... 난 그냥 욕심 없이 파는 겨."

아침은 먹었느냐는 물음에 곧 가서 먹을 거라며 손사래를 치자, 할머니는 굳이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믹스커피를 내어오셨다. 바닥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할머니의 손자 손녀 자랑, 아들 자랑, 그리고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살았다는 지난 인생의 추억을 도란도란 들었다. 마을 언덕 뒤쪽 과수원이 모두 할아버지가 가꾸시던 밭인데, 벌들이 여기서 꿀을 떠오는 거라고, 소천하시고 할머니가 가꾸느라 힘들어 죽겠다는 투정도 받아주었다.

논과 밭을 가르며 몸을 환기했던 아침의 러닝, 그 속에서 느낀 자연의 속도.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마을 아주머니의 캔 식혜, 토종꿀로 인해 맺어진 "꿀할머니"와의 따뜻한 커피 한잔. 그리고 손에 들린 구하기 힘들다는 보물같은 토종꿀.

창업, 생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압박감 속에 완벽한 계획만 좇던 내 마음속에, 시골의 따수운 넉넉함이 차곡차곡 스며들고 있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