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 곡성> Ep.1 압박
(이 글은 해방일지 - 곡성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 입니다.)
모니터 불빛에 눈이 뻑뻑해질 무렵, 문득 며칠 뒤가 곡성 워케이션 출발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땐 뭔가 다 돼있겠지 하며 아무 생각없이 신청해둔 워케이션.
분기 말이었다. 새로운 커뮤니티 기획이라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이름도 컨셉도 어느 하나 정해진 게 없는 백지상태였다. 당장 눈앞에 쌓인 일들과 텅 빈 기획서가 주는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 치열한 시기에 쉼표를 찍는 게 맞나 하는 의심을 안은 채, 도망치듯 작은 가방에 옷 두 벌만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가방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도착한 곳은 곡성 심청한옥마을 내에 자리 잡은 워케이션 공간, 러스틱 타운이었다. 고즈넉한 한옥의 평화로움도 잠시,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모인 회의실에서는 뜻밖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아직 서로 이름조차 다 못 외웠는데, 누군가 보드마카를 쥐더니 칠판에 3박 4일의 일정을 빽빽하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이것(계획)도 넣어줘!", "이때 장을 보러 가자!"라며 거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저기... 우리 쉬러 온 거 맞지?" 이 말에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우리... 일은 할 수 있는 거 맞지?" 일하러 온 우리도 마주 보며 깔깔거렸다.
어쩌다 보니 시작부터 유쾌한 프로계획러들의 모임이 되어버렸고, 이 기회로 낯가림은 금세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 빽빽한(?) 일정표 덕분에 우리는 둘째 날, 수박 한 통을 들고 곡성의 계곡으로 향했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계곡에는 우리뿐이었다. 시원한 물소리를 배경으로 의자를 펴고 앉으니 천국 같았다.
'그래 이거지. 이 맛에 여행하지'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돗자리에 누워 낮잠을 청한다.

"아참! 수박 먹자!" 누군가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다. 막내인 하민이가 뛰어가 수박을 자를 칼을 분주히 찾는다. 한 입 베어 물었는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 맛있다! 달다!" 마저 남은 수박을 썰어주던 하민이가 주변 누나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수박을 들고 보디빌딩 포징을 취한다. 계곡에는 여기저기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와 함께 '워터멜론 보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충분한 쉼 뒤에 찾아간 시골 카페. 커피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한쪽에 마련된 전통놀이 존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뷰 올리면 농산물 드려요.단순한 마케팅 컨셉인 줄 알고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하던 우리 뒤편으로 사장님이 넌지시 말했다.
"그... 리뷰 써주시면 진짜 여기 농산물 드려요. 오늘은 애호박이에요."
한 친구가 리뷰를 써서 보여주자, 사장님 부부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이내 뒤뜰로 가 채소들을 따신다. 얼마지나지 않아, 진열되어 있던 애호박부터 갓 딴 상추, 처음 보는 담뱃잎 상추, 고추, 마늘까지 싱싱한 채소들을 한가득 내어주신다. 이것이 시골 인심인가.

받아들고 온 농산물의 양을 보고는 모든 친구들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더니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야... 이건 써 드려야 돼. 1인 1리뷰 써!" 음료 앞에서 이렇게 모두가 일편단심으로 리뷰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가득 찬 농산물 봉지를 보니 더 헛웃음이 났고.*
"이거 돌아갈 때까지 다 못 먹겠는데?"
우연히 만난 사장님 부부의 넉넉한 마음 덕에 실제로 우리는 돌아가는 날까지 푸짐한 식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우연의 연속, 그리고 그 우연 속에서 사람 사이의 온기를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백지상태의 기획서가 주던 그 답 없는 막막함이 어느새 녹아내리고 있었다.
숙소인 러스틱 타운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내 시야에 쓰러져가는 초가집 벽의 투박한 팻말 하나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토종꿀 판매. 010-XXXX-XXXX
우연한 발견. 그것이 또 다른 연결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Ep.1 압박 마침.)
*덧1: 직업병 때문인지 이 때 짧은 생각이 뒤따라왔다.
'아- 우리 서비스도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했으면 좋겠다... 발 벗고 자진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들게 하는 걸까. 그냥 이렇게 퍼주면 되는 건가? 그럼 우린 뭘 퍼줘야 하지?'
*덧2: 우리가 하고 있는 커뮤니티는 ACTS29라는 커뮤니티이다.
**표시가 된 사진은 모두 사진작가 성은님이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