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여행의 이유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Ep.3 여행의 이유
여행
로마의 아침은 달콤하고 진하다.

현지인들처럼 동네 카페에 앉아 크림을 듬뿍 넣은 빵 마리토찌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 밥보다 빵과 커피를 더 선호하는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아침 루틴이 아닐 수 없다.

그날도 어김없이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피렌체에서 샀던 0.05mm 펜과 노트를 꺼냈다. 에스프레소 잔을 비우며 눈앞에 펼쳐진 로마의 풍경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Wow! Amazing your work! Are you a designer?"
(와! 작품 너무 멋진데요! 혹시 디자이너인가요?)
이 동네 이탈리아인으로 보였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카페를 나서는 길.이상하게도 마음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더니, 해내야만 한다는 마음 그리고 고독으로 차있던 나의 온몸을 물들였다. 작지만 확실한 '첫 인정, 첫 성공'
여행의 이유

그저 펜을 쥔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 이게 바로 이방인으로서 낯선 도시에 떨어지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아닐까.
내가 한국에서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직함으로 불려왔는지, 업계에서 얼마나 대단한 임팩트를 냈는지.
그는 전혀 궁금한 것 같지 않았다.

이력, 타이틀... 이런 모든 수식어는 부질없다는 듯 오래된 녹이 떨어지듯 힘을 잃고, 오직 '지금 이 순간 내가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순수한 교류.
지구 반대편 동네 카페에서, 처음 보는 현지인과 내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같은 한 장면". 이 찰나를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담아두고 싶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장밋빛 미래
이거다! 라는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완벽한 내 스타일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낭만으로 물들어 자신감으로 충만하던 마음은 며칠이 채 가지 않았다. 그리는 과정 자체는 여전히 즐거웠지만, 완성된 그림들은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밑천이 곧 드러났다. 원근감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건물들은 어색하게 기울어졌고, 잘 그리고 싶다는 초심자의 욕심에 모든 선을 꾹꾹 진하게만 긋다 보니 명암 조절에 실패해 먹색 그림이 되기 일쑤였다.
물리적인 고통도 질세라 뒤이어 따라왔다. 손바닥만 한 A5 크기의 노트에, 머리카락보다 얇은 0.05mm 펜으로 유럽의 웅장하고 복잡한 건축물들을 채워 넣다보니 온몸이 쑤셨다. 눈은 시큰거렸고, 등은 굽을대로 굽어있었다. 무엇보다 한 작품 완성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니야?'
아니나다를까, 화면 속 버튼을 몇 초 만에 뚝딱 옮기던 UI 디자이너 시절의 버릇이 튀어나왔다. 습관처럼 효율성을 계산하다가, 결국 노트를 덮기 일쑤였다.
고군분투
답답한 마음에 매일 밤 숙소 침대에 누워 핀터레스트를 뒤졌다.
내가 반했던 펜화들을 수집하고, 내 그림과 비교하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배움의 간극을 메꾸느라 끙끙대기 일쑤였고, 그 사이사이엔 엉뚱한 시도들도 이어졌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화방에 들렀을 때, 그간의 답답함이 분출되었다.
실력의 한계를 다양한 색으로 덮어보려 펜을 종류별로 집어 들었다.
10만 원이 넘는 영수증을 충동구매의 결과로 받아들었지만 말이다.
아- 그 덕분에 며칠 동안 시리얼만 씹어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답답하던 마음은 조금은 후련해졌으니 후회는 없다.

나는 생각한다.
남유럽이라는 타지 땅에서 고군분투하던 나를 생각한다.
타지 땅에서 자기 스스로와 싸우던 내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다만 이 과정이 결국 나만의 고유한 선을 찾아가기 위한 좌충우돌이었음을,
비록 유일한 방향은 아닐지라도,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이내 인정하고 만다.
비효율과 한계를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찾고 있던 나만의 색으로 나를 물들여가고 있었다.
*저자주: 이는 현실성 없는 포장된 말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