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힘 있는 디자인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Ep.4 힘 있는 디자인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Ep.4 힘 있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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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슨, 조너선 아이브, 프리즈 아트페어, 그리고 테이트 모던. 디자인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 뛸 수밖에 없는 이름들. 나에게 영국은 무엇이 기대되냐고 묻는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가장 고대하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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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런던에 도착했다. 유럽– 특히 그중에서도 영국– 의 갤러리와 박물관은 거대하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은 이방인조차 그 분위기에 단번에 숨이 멎는 듯 침묵하게 된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그렸지...'

수천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명해내는 그 거대한 규모 앞에서 나는 번번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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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국은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모던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자국민들의 문화예술 교양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나. 가난한 장기 여행자였던 나에게는 더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런던에 머무는 내내 매일같이 미술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매일 그곳에서 그림 자체를 감상하다보니, 그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관찰하는 발칙한 취미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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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서둘러 사진만 찍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 – 유럽의 미술관에는 그런 사람들이 드물었다.

거대한 캔버스 앞에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들.
처음 보는 이와 작품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새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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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안의 풍경은 내가 보고 알던 것과 달랐다. 예술품이 단순히 많다는 것을 넘어서는, 고유한 품격이자 저력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수백 년 전의 역사적 사건과 문화를 담아낸 그림이 전 세계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다.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며 다시 현재를 살아갈 영감을 얻는다. 이 거대한 순환의 고리, 즉 예술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경제적 효과의 루프는 내게 깊은 영감과 매력으로 다가왔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의 고궁이나 식문화, 수많은 역사적 맥락과 현시대의 역동적인 문화를 이런 식으로 디자인해낸다면 어떨까.'

힘 있는 디자인

유럽 전역을 돌며 미술관을 찾기 전까지, 내 머릿속은 온통 조급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조금씩 어긋나는 투시도법과 부족한 스킬을 탓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화면 속 버튼을 몇 초 만에 옮기던 UI 디자이너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펜화 하나를 그리는 데 드는 오랜 시간을 비효율적이라며 자책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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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런던의 미술관에서 사람들을 멈춰 세우는 거장들의 작품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내 고민의 촛점이 완전히 어긋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들. 그 위대한 작품들이 가진 본질적인 힘은 단순히 기술이 완벽해서, 혹은 효율적으로 빠르게 그려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시대의 철학과 진중한 고민, 작품을 휘감는 야성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어우러지도록 감싸는 고유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미술관 문을 나서는 순간 명쾌해졌다. 스킬의 부족함이나 비효율을 탓하던 것은, 방향을 잃은 내 불안함이 만들어낸 핑계였을 뿐이라는 걸. 펜화 기술의 마스터는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나의 진짜 목표는 나의 디자인이 힘을 갖는 것이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당장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내가 앞으로 만들어낼 작업물들이 일회성 예쁜 기념품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어떤 힘을 보여줄 것인가를 깊이 묻고 답하는 것. 스스로 그 과정을 가치 있게 여기며 묵묵하게 선을 쌓아가는 것.

그것은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명확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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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스킬 부족을 탓하며 좁은 노트 위에서 절망하던 나의 굽은 등을. 비효율이라는 핑계 뒤로 숨으려 했던 초보 디자이너의 조급함을.

3개월 동안 남유럽을 뱅뱅 떠돌며 방황했던 그 모든 얕은 고민들은, 여행 4개월 차에 다다른 영국에서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넘어, 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다짐. 펜 하나로 시작된 나의 유학은 비로소 영국에서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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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