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심장박동수 100 –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펜화 작가 이하정 시리즈 - 펜 하나로 시작한 셀프유학기] Ep.2 심장박동수 100 - 피렌체
여행을 떠나기 전, 내 직함은 기획자이자 UI 디자이너였다.
화면에 버튼을 배치하고,
사용자의 시선을 유도했다.
'파란색 버튼이 클릭률이 높다'는 인지과학적 분석이나,
'취소 버튼은 왼쪽에 두어야 한다'는 애플의 가이드라인.
그 정해진 규칙들이 어느 순간 나를 가두는 거대한 틀처럼 느껴졌다.

'10년 뒤에도 나는 화면 속 네모난 버튼을 깎고 있을까?'
AI 이야기가 이따금씩 오가고,
이에 세상이 원하는 건 빠르고 효율적인 UI 디자이너였다.
일러스트레이터나 작가라는 직업은 왠지 끝물처럼 느껴지는 시대

머릿속은 복잡했다.
"나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걸까?"
"디자인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이 셀프유학의 첫 번째 목표는 대단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보는 것'.
그 질문 하나를 배낭에 넣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피렌체, 심장박동수 100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이탈리아 피렌체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빈티지 엽서가게.

수많은 그림들 사이에서 유독 시선을 붙잡는 작은 엽서 하나가 있었다.
얇고 단단한 펜으로 섬세하게 그어 내린 이탈리아의 풍경.

그 '펜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 손목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 ? '
시선을 내려 손목으로 향했다.
애플워치 화면은 붉은 글씨로 외치고 있었다.
심박수 100.
머리로 계산한 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도 아닌.
그냥,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0.05밀리미터
이 기분을 놓칠세라 바로 주변의 화방을 검색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화방에서 나는 두 시간을 내리 보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100g짜리 드로잉 노트 한 권. 0.05mm 얇은 펜.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

계산을 마치자마자 근처 카페로 달려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방금 산 펜의 뚜껑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피렌체의 풍경을 흰 종이 위에 긋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이전까지 끄적였던 드로잉들과 달리, 이런 정교한 '펜화'는 태어나서 처음인 셈.
그저 방금 엽서가게에서 보았던 그 얇은 선을 내 손으로 직접 그어보고 싶다는 맹렬한 충동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머리로 고민하던 수많은 질문들이 사라진 자리.
오직 종이에 닿는 0.05mm 펜촉의 사각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그렇게 나의 첫 펜화가, 그리고 앞으로 여행 내내 이어질 진짜 내 스타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떨림. 이유 없이 심장이 뛰던 그 순간의 감각.
이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호라는 것을.
'찾았다. 드디어.'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