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시리즈. 인생은 파노라마처럼 - 굴업도, 인천] Ep. 3 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잔을 부딪히고, 그제서야 이미 저녁이 놀이 내려앉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조금씩 낮아졌고,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낮에 따뜻하던 풀들도 그늘이 닿자 금세 식어 물기를 머금었다.

백패커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팩을 박는 소리도 어느새 잦아들고,
대신 포장지를 뜯는 소리, 물을 붓는 소리,
그리고 작은 웃음소리들이 들렸다.

자연을 사랑하는 백패커들이어서인지
다들 비화식 음식들을 꺼내 조리하고 있었다.

우리도 짐을 뒤적거렸다.
물을 넣으면 알아서 데워지는 뽀글이.
참치캔. 육포.
그리고 진공 포장된 족발.


근사한 요리는 없었고, 대단한 장비도 당연히 없었다.
비닐을 뜯고, 병을 따고, 젓가락을 나눴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이 순간.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를 채우는데 무엇이 부족하다 느끼겠는가.

사업 이야기, 육아 이야기, 재정 이야기도 했다.
꿈,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들도 이야기 했다.

친구는 여전히 오래된 친구였다.

아이 아빠가 되었고,
집에 돌아가면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이 되었지만,
말투는 여전하다.
웃는 타이밍도 그대로 -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한 박자 늦게 피식 웃는 것도 말이다.

우리는 한참 떠들다가 어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드니 별이 보인다.
물론 함께 봤던 몽골 하늘의 별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슴푸레 앉은 밤바다의 풍경이 별들과 조화를 이뤘다.
텐트들이 하나 둘 언덕 위의 작은 램프가 되어 유일한 등불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각자의 텐트로 들어갔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산 일인용 텐트. 무려 8천 원짜리 텐트.

가격이 너무 말이 안 돼서 오히려 의심스러웠지만,
풀어볼 시간도 없어 포장 그대로 가져온 텐트를 뜯어보니 구성품은 다 있었다.
천도 있고, 폴대도 있고, 팩도 있고, 없을 게 없는게 되려 신기했달까.

"뭐꼬? 8천원? 혜자인데? 내껀 훨씬 비싼데 팩도 안줬다"
해가 중천일 때, 내 텐트의 팩을 박으며 친구가 말했다.

그래, 일단 있을 건 다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침낭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괜찮았다.

'춥긴 춥네.'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왠지 공기가 상쾌하다.
코끝에 닿는 공기가 차가운만큼 맑다.

밖에서는 고동소리가,
멀리서는 파도가 계속 부서졌다.
텐트 천은 바람에 펄럭거린다.

어느새 잠들었나보다.
새벽에 몇 번이고 깼다.
무언가가 나를 섬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몇 번째쯤 깼을 때일까
얼굴에 뭔가가 닿아 있다.
침낭이 목위로 올라온 줄 알았으나,
잠결에 손을 뻗어 만져보니 텐트 천인듯 싶다.

왜 솟아 있어야할 천장이 내려와있는 걸까.
내 얼굴 바로 위로.

잠결에 생각한다. 아니, 꿈인지도 모른다.
'텐트가 무너졌구나.'


바닷바람이 얼굴 근처까지 들어왔고, 축축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천에 반쯤 덮인 채, 마음 속으로는 '어떡하지?'를 외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친구가 먼저 일어나 아침을 깨웠다.

밖에서 기지개 켜는 소리 그리곤 발소리가 나더니 점점 가까워진다.
내 텐트 앞에서 그 발소리가 멈춘다.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버린듯,
잠깐 멈추더니, 이내 잠이 달아날 정도의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10년을 넘게 보아 온 그 웃음이 천 너머로도 보이는 것 같았다.
“거- 가만있어봐라.”

말끝에 장난기가 잔뜩 묻은 부산 사투리

찰칵-

나는 얼굴에 텐트 천을 얹은 채로 웃었다.

“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친구가 상황극을 시작했다.

우리는 어릴 때도 이런 식으로 놀았다.
갑자기 아무 장면이나 붙잡곤,
역할을 만들고,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다 둘 중 하나가 먼저 터지면 같이 박장대소하며 무너졌다.

그걸 아직도 하고 있다.

서른 후반이 되어, 이 굴업도 언덕 위에서.
한 사람은 아이 아빠가 되고, 한 사람은 회사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나는 텐트에 깔린 채로 웃었다.

부끄럽지 않다. 되려 이상하게 고맙다.

이 나이에도 누군가의 앞에서 이런 꼴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게.
친구가 그걸 보고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리고 우리가 함께 웃고 있다는 게.

마치 이 친구와는 동심으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나와보니 텐트는 완전히 주저앉아 있다.

천장이 낮게 내려와 있고, 위쪽 고정끈은 튿어져 이미 제 역할을 잃었다.
안쪽은 축축했고, 침낭도 젖어 눅눅했다.

그제야 텐트가 있던 자리를 봤다.

땅이 기울어져 있었다.
머리 쪽에서 발 쪽으로 조금씩 낮아지는 자리.
밤새 몸이 아래로 밀렸나보다.
내가 자는 동안 조금씩. 그래서 누가 발을 잡고 밑으로 당기는 것 같았나보다.
내 무게를 이 8천 원짜리 조악한 텐트가 버티지 못한걸게지.

어쩌면 당연한 결말일지도.

배송비도 안 나올 법한 값싼 텐트.
처음 하는 백패킹.
대충 고른 자리.
기울어진 땅.

모든 조건이 성실하게 모여 텐트를 무너뜨렸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잘 잤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바다는 여전히 소리를 냈다.
젖은 풀 냄새가 났다.

친구는 아직도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사진 속에는 사람이 아니라 짐짝 같은 것이 있었다.
무너진 텐트 아래에 눌린 내가 있었다.

"어허이~ 거기서 주무시면 안됩니다~" 라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하며,
함께 한참을 웃었다.

짐을 정리한다.

텐트는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폴대도 천도 다 쓴 일회용품 마냥 망가져있다.

"어이- 그래도 자기 몫은 했다 아이가! (킥킥)"

맞다 그 정도면 됐지.

돌아가는 날에는 비가 왔다.
아니, 비라고 하기엔 작은 물기.
운무와 해무가 섬 사이에 걸려 있었다.

어제의 금빛 언덕은 사라지고 없었다.
풀들은 젖어 조금 어두워졌고, 바다는 흐렸다.
멀리 있던 섬들은 안개 뒤로 반쯤 숨었다.

이 모습도 좋다.

맑은 날만이 이 섬의 얼굴은 아니니까.
젖은 풀.
흐린 바다.
안개 속으로 낮아진 언덕.

굴업도는 돌아가는 날까지 다른 표정을 보여주었다.

마을의 사정

하산해서 이장님댁에 들렀다.
마을 어른들과 인사를 하려던 찰나, 고막을 뚫고 소리가 들어온다.

탕!탕!탕!탕!
비에 젖은 공기를 뚫고, 쇠가 땅을 치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이장님댁 뒤편
삐까번쩍한 레저타운인지, 풀빌라인지 모를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땅은 파헤쳐져 있었고, 자재들이 쌓여 한창 공사 중이었다.

또 다시,
탕!탕!탕!탕!

멀리서 나는 소리인데도 귀가 아렸다.

그 앞에 마을집들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집들. 밥 냄새가 나던 집.
트럭으로 짐을 실어주던 사람들이 사는 집.

거의 완성되어가는 새 건물들의 뼈대 앞에서 그 집들은 더 작아 보였다.

문득 첫날 일이 떠오른다.

"뭘 엿듣고 그래!"

사람 좋아보이는 이장님이 누군가에게 역정을 내던.
그때는 왜 저렇게 예민할까 싶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자본이라는 잔인함에 마음이 조금은 씁쓸해진 채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하루에 한 번 들어오는 배.
열몇 가구가 사는 섬.
주말마다 밀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마을 뒤에서 올라가는 번쩍이는 건물.

선착장

배가 들어왔다.

전날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주말을 맞아 들어온 백패커들이었다.
큰 배낭을 맨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려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웅성 작은 선착장을 가득 메웠다.
깔깔대는소리, 환호하는 소리, 놀라는 소리

친구가 말했다.

“주말은 안 되겠다.”

"그러게-" 나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배에 올랐다.

일은 그대로였다.
돌아가면 써야 할 글이 있었고,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회사도 다시 굴러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무너진 텐트 안에서도 하룻밤이 무사히 지나갔기 때문일까.
아침이 오면 친구가 와서 웃고, 망한 장비는 쓰레기장에 버리면 된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맑은 모습으로 우리를 배웅한다.
섬이 조금씩 멀어진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