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언덕 - 굴업도, 인천
[시리즈. 인생은 파노라마처럼 - 굴업도, 인천] Ep. 2 금빛 언덕
밥을 먹고 나왔는데도, 벽에 걸린 사진이 마음에 남는다.
사진 속 젊은 얼굴 둘, 그리고 바로 옆 주름진 얼굴 둘.
옆에선 배낭을 고쳐 메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개머리언덕으로 가는 길.
생전 처음 보는 이 곳의 빛깔이 어딘가 익숙하다.

금빛
봄. 대낮의 태양은 머리 위에 있었지만, 살갗을 찌르지는 않았다.
바람이 먼저 닿고, 빛이 그 뒤를 따라왔다.
들판의 금빛.
온도가 주는 포근함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가 주는 충만함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새싹이 아직 올라오지 못한 풀들.
겨울을 막 지나온 갈색과 회색 사이의 빛. 버티고 남은 색이랄까.
추수철의 눈부신 금빛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풀의 몸통마다 햇살이 얇게 얹혀 있었다.

언덕으로 가는 길, 아까 본 소녀를 다시 마주쳤다.
햇빛에 그을린 까만 얼굴. 옆에는 강아지가 있다.
그 아이가 이 섬 사람인지, 잠깐 머무는 아이인지 궁금했다.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막 녹은 땅이 발밑에서 조용히 받쳐주어 폭신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매기 소리는 바람에 섞여 끊겨 들린다.
나는 가끔 뒤를 돌아보았다.
땅과 바다와 하늘이 비율을 맞춰놓은 듯 펼쳐져 있다.
낡은 풀의 갈색. 바다의 푸른빛. 하늘의 에메랄드 색.
자연이 색 공부따위 했을리 만무한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색조합을 찾아낸 듯하다.

개머리 언덕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꽤 높은 능선에 도착했다.
"와-"
가려져있던 눈 앞의 바다 그리고 이 바다를 발판 삼아 쉬고 있는 언덕이 펼쳐졌다.
그때 왜인지 가족들이 떠오른다.
'아빠랑 지원이가 여길 와봐야 하는데-'
아버지는 자연을 좋아하신다.
얼마 전 함께 히말라야를 걸었다.
걸음은 예전보다 조금 느려졌지만, 산이 보이면 얼굴이 먼저 밝아졌다.
더 늦기 전에 이런 곳을 더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이든걸까.

바람이 지나갔다.
오래된 풀들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내 입가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노래를 흥얼 거렸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 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데
스쳐가네 파노라마 처럼
친구는 잘 모르는 눈치이다. 그래도 반응해주고 싶은지,
'맞제, 맞제, 인생 짧제-' 한다.
그도 어느새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최신 노래보다 아이 밥 시간을 더 잘 아는 사람.
주말 계획보다 가족 일정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
그 얼굴이 낯설고 반가웠다.

우리는 대학생 때 만났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밤마다 낄낄거리고, 공부하다 말고 철학이 어떻고 인생이 어떻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여기 서 있다.
한 사람은 아이를 키우고, 한 사람은 회사를 붙잡고.
하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얼굴들로.

내 친구지만 참 멋있다.
소꿉놀이
마음 급한 백패커들이 이미 도착해 텐트를 쳐놨다.
여기저기 팩을 박는 소리가 우리 발걸음을 재촉한다.
작고 알록달록한 텐트들. 그리고 사람들.
멀리서 보고있노라면 꼭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친구는 익숙한 듯 자리를 본다. 나는 옆에서 어설프게 거든다.
조금이라도 평평하고 잔디가 있는 곳.
"여기 좋다"
"나도"
마침내 시야가 좋고 볕이 잘 드는 곳을 하나 정했다.
바람에 텐트 천이 부푼다.
나는 줄을 붙잡고, 친구는 팩을 박는다.
능숙한 친구의 솜씨에 순식간에 텐트를 설치하고는 의자를 펴고 나란히 앉았다.

밥이 끓는 소리에 배가 고파졌다.
오늘까지인 뉴스레터는 아직 발행하지 못했다.
커뮤니티 모집 걱정도 머리 속을 뱅글뱅글 맴돈다.
회사 일은 여전히 남아 있고, 문제가 풀린 건 없었다.
그래도 오길 잘했다.
붙잡고 있던 것들이 잠깐 작아진 듯 보인다.
쥐고 있던 것들이 이 풍경 앞에서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놓치고 있던 것들이 되려 더 선명해졌다.

오래된 풀들이 발목 근처에서 바스락거렸다.
친구가 건배를 하잔다.
저무는 햇살 위로 잔을 들어올린다.

(마침.)
보너스

꽃사슴

그림같은 섬.

일몰